『문화과학』을 창간하며(1992)

역사의 한 순환이 끝나고 새로운 순환이 시작하고 있다. 인류 진보의 대안을 제시하던 현실사회주의가 몰락하고 세계는 자본주의 단일체제로 전환하고 있다. 이제 지배세력인 자본은 전지구적으로 별 저항도 받지 않고 그 지배를 강화할 수 있게 되었다. 전세계 진보세력은 심대한 위기에 처해 있으며 우리라고 해서 예외가 아니다. 국내 진보진영은 이론과 실천 양 측면에서 침체의 늪에 빠져 일부는 ‘청산’의 길을 가기도 한다. 그러나 역사는 끝나지 않았다. 위기 속에서도 새로운 모색과 창조를 위해 고통을 감내하는 민중이 있기 때문이다. 자본의 전지구적 지배로 인류 운명이 더 큰 위기에 빠진 지금이야말로 역사의 또다른 순환을 위한 새로운 기획을 세울 때다. 우리는 『문화과학』으로써 이 기획에 동참하고자 한다.

우리가 ‘문화과학’의 이름으로 진보의 기획에 동참하는 것은 문화가 전에 없이 중요한 계급투쟁의 장으로 전환하고 있다는 판단 때문이다. 현단계 지배세력은 독점자본주의체제의 구축으로 사회의 전영역을 장악하면서 자신의 지배구조를 재생산하고 있고 진보진영은 그 지배구조를 변혁하고자 한다. 오늘날 문화가 이 재생산과 변혁에 대해 가지는 역할은 아주 크다. 문화는 재생산에 지대한 기능을 하는 이데올로기 작동의 중심 영역이면서 또한 변혁의 꿈이 마련되는 곳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문화에 대해 과학적인 인식을 확보하는 것은 현단계 지배에 대한 정확한 대응의 하나이며 지배구조의 변혁을 위한 한 단초를 여는 일이다. 우리 『문화과학』은 문화에 대한 과학적 인식 확보를 통해 변혁에 기여할 것을 창간취지로 삼는다.

우리가 『문화과학』의 성격을 문화이론전문지로 잡은 것도 이 때문이다. 문화를 과학적으로 인식하기 위해서는 과학적 문화이론의 수립은 필수다. 하지만 현재 과학적 문화이론은 그 정초조차 마련되어 있지 않다. 현단계 문화이론은 관념론으로 크게 물들어 있고 과학적 문화이론 구성을 위해 필요한 기본 개념들조차 아직 확보하지 못한 상태다. 관념론으로 가동되는 부르주아 문화이론이 진보적 문화이론 진영 일부에 침투하는 일도 그래서 드문 일은 아니다. 과학적 문화이론을 수립하려면 문화이론에 침투한 관념론을 극복하는 것이 꼭 필요하다. 우리는 이 극복이 결코 만만치 않은 작업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지만 절대 포기해서도 안될 과제임을 명심하고 있다. 이 과제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유물론적 문화이론의 정초를 놓아야 한다. 관념론적 문화이론을 극복하는 길은 오로지 유물론의 터전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관념론적 부르주아 문화이론을 비판하기도 하겠지만 그것의 극복을 위해 더 큰 노력을 기울이고자 하며 따라서 유물론에 바탕을 둔 과학적 문화이론을 구성하고자 한다.

우리는 과학적 문화이론의 구성으로 진보적 문화이론 진영, 나아가 실천 진영에 기여하고자 한다. 진보적 문화 세력은 관념론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다고 할 만큼 과학적 문화이론을 탄탄히 세우고 있지 못하며 그 전략적 시야도 아직은 충분히 넓다고 할 수 없다. 예컨대 문화운동권에서 문화를 문예 중심으로 사고하는 경향이 있는 것도 이런 사정을 반영한다. 물론 문화운동권은 ‘현실주의’ 이름으로 부르주아 문화이론의 관념론적 경향을 극복하려는 노력을 끊임없이 해온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런 노력이 문예론에 국한되어 전개됨으로써 문화운동이 문예운동에만 초점이 맞춰져 전체 문화판도에 대한 대응을 제대로 하지 못한 면도 없지 않다. 우리는 과학적 문화이론의 수립을 통해 문예론의 한계를 극복하고 문화론의 총체적인 전망을 확보하여 문화운동 전략을 제대로 수립하는 데 보탬이 되고자 한다. 물론 이것은 현단계 진보적 문예론이 지향하는 현실주의론이 오류 그 자체라는 말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현실주의적 시각은 우리에게 소중한 자산이되 이제 현실주의 문화론의 단계로 나아가야 한다고 믿는다.

우리는 우리의 작업이 기본적으로 이론적 실천에 속하므로 현실세계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문화적 실천의 단순한 일부일 수 없다고 믿는다. 따라서 이론적 실천으로서 『문화과학』의 작업은 문화적 실천으로 대체될 수는 없다. 하지만 이론적 실천이 전체 사회적 실천의 한 부분인 한 그것은 문화적 실천을 포함한 모든 사회적 실천과 융합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이는 곧 『문화과학』이 변혁의 꿈을 품고 출발한다는 것을 말한다. 우리는 자본주의체제가 만들어내는 억압적 문화현실을 더 나은, 살맛나는 것으로 바꾸기 위한 전략을 모색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서는 자본주의 문화현실에 대한 비판적 분석이 필수다. 그러나 우리는 이 분석이 정태적인 비판으로 끝날 것이 아니라 변혁의 전망 속에 이루어져야 한다고 믿는다. 따라서 비판적 분석은 문화현실에 대한 개입을 목표로 하며 특히 지배세력이 문화현실에서  제거하고자 하는 정치를 되살리려는 목적을 가진다. 동시에 『문화과학』은 이미 문화현실에서 정치를 실천하고 있는 쪽에 대해서도 ‘이론’의 이름으로 개입하고자 한다. 지배세력은 자신의 문화적 실천에서 부르주아 정치를 실천하며 문화운동권은 또 그 나름대로 다양한 종류의 정치를 실천하고 있다. 『문화과학』은 문화현실에서 암시적으로나 명시적으로 드러나는 다양한 정치적 실천에서 현단계 지배체제의 억압적 성격에 근본적으로 맞서는 해방의 정치에 동참하고자 한다. 문화운동의 지평을 넓히고 그 내부에 스며든 관념론을 제거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은 이미 했지만 우리는 과학적 문화이론의 수립을 통해 문화운동권의 일부가 드러내고 있는 오류에 대해서도  개입하고자 한다. 우리는 이 개입이 정치에 대해 ‘과학’이 해야 할 몫이라고 본다. 그리고 이는 우리가 이론을 위한 이론에 집착하지 않고 이론과 실천의 올바른 결합을 지향하며 이론적 실천에 임하겠다는 말이기도 하다.

이와 같은 문제의식에서 출발하는 『문화과학』은 크게 보아 세 가지 작업을 해야 한다고 보며 우리의 지면 구성에 그것을 반영하고자 한다. 첫째, 이미 말한 대로 우리의 주요 과제는 과학적 문화이론을 구성하는 일이다. 우리는 현단계 우리의 이론적 역량이 얼마나 미흡한지 잘 안다. 우리가 과학적 문화이론을 구성하는 과정에서 기존의 유물론적 문화이론에 많이 기대는 부분이 있다면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언제까지고 ‘이론선진국’의 이론들을 수입해서 쓸 수는 없다. 이제 우리도 이론 생산에서 자생력을 길러 세계적 수준의 이론, 문화이론을 수립할 수 있어야 한다. 따라서 『문화과학』이 과학적 문화이론의 구성을 위한 이론화전략에 가능한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자 하는 것은 자연스런 일일 것이다.

둘째, 이 이론화전략은 사회적 실천, 특히 문화적 실천과 관련된 것이므로 우리는 문화적 실천을 위한 전략 마련에 부심하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우리는 문화운동의 전략구상을 중요한 과제로 삼는다. 우리는 이 전략구상에 문화정세 분석이 핵심적 부분을 이룬다고 본다. 오늘날 문화가 지배구조의 재생산에 한 몫을 단단히 하고 있는 것은 그것이 역사과정의 한 부분으로서 물질적 생산과 재생산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문예작품의 현실 개입은 올바른 반영을 통해서 이루어지기도 하지만 동시에 문예제도, 문화제도 안에서 그것이 처한 위상에 의해서도 이루어지고 있다. 따라서 문화운동은 이와 같은 문화정세에 능동적으로 대응하는 방식이어야 할 것이다. 『문화과학』은 문화정세를 과학적으로 파악하고자 하며 그것에 입각한 문화운동 전략 구상을 하고자 한다.

셋째, 『문화과학』은 문화현실에 대해 깊은 관심을 기울이고자 한다. 오늘날 우리 문화현실은 자본의 지배 확장으로 전과는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다. 시각과 청각 등 감각들의 새로운 관계설정이 일어나고 있으며 문화의 지형이 크게 바뀌었다. 이제는 ‘읽을 거리’들이 반드시 문예작품의 형태로만 나타나고 있지는 않으며 또 문예작품은 그것대로 상품 광고에 차용되기도 하는 등 문화의 내부 역학구조도 바뀌고 있다. 우리는 이처럼 변동하는 문화현실을 변혁적 시각에서 분석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보며 이 분야에서 새로운 전범을 세울 것을 바란다. 다양한 문화현실을 풍부하게 분석하고 변혁의 전망을 읽어내는 새로운 글쓰기 방식을 도입하고자 『문화과학』은 ‘문화현실분석’란을 고정으로 배치한다. 물론 처음 시도하는 일이라 한 술밥에 배부르지 않을 것임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이 난을 통해 문화를 물질운동으로 파악하면서 그 기능과 역동성을 보여주는 유물론적 글쓰기 관행이 확립되기를 기대한다.

우리는 이제 두려움과 희망이 교차되는 어려운 첫발을 내딛는다. 정세는 엄중하고 역량은 미약하다. 그러나 가야할 길을 가는 것은 더 나은 미래를 믿는 사람들의 자세일 것이다. 우리는 과학을 지켜 더 나은 미래를 꿈꾸고자 한다.

 

『문화과학』 편집위원

* 『문화과학』의 제호를 눈여겨 보시라고 독자 제위께 권하고 싶다. 혹자들에게는 어설프게만 보일 『문화과학』의 표제는 ‘문화’와 ‘과학’이 동렬로 배치되어 있지 않고 엇비슷하게 놓여 있는데 그렇게 한 데는 이유가 없지 않다. 그 제호배치는 문화에 대한 과학이라는 의미의 ‘문화과학’보다는 혹은 ‘문화’와 ‘과학’의 평면적 결합을 시사하기 위하여 문화과학을 일렬로 배열하지 않고, ‘문화’와 ‘과학’ 간에 있는 분리, 연관, 또는 긴장의 관계들을 시각적으로 떠올리고자 하는 의도로 배치되어 있는 것이다. 창간호에서 이미 밝힌 바지만 우리는 그런 취지에서 문화를 과학의 문제로서 파악하면서 문화적 실천과 이론적 실천의 관계를 나름대로는 면밀하게 규명하고자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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