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호를 발간하며

 

'가상현실'이 아닐까. '비자금'-'대선자금'-'5.18'로 이어지는 정국의 변동으로 "소설보다 더 재미있는," 허구와 더 이상 구분이 안되는 이 '현실'! 현실감을 돋운다는 명목으로 현장 밀착 취재라는 것에 집착하기도 하는 뉴스 시간에 상상의 장면들이 '사실'로 나오기도 한다. 노태우씨가 검찰에 소환되기 전 한 TV방송국은 검찰청에 소환되어 한강을 건너는 노씨의 모습을 컴퓨터 그래픽으로 작성하여 만감이 교차하는 가운에 한강을 바라본다는 멘트를 덧붙여 방영한 적도 있다. 편리하게도 「코리아게이트」와 「제4공화국」이 방영되어 16년전 만든 5.18 자료 화면들과 뒤섞이기도 하였다. 결국에는 안양교도소에 수감된 전두환씨의 가상적 모습을 담은 영상도 화면을 타게 되었다.

이런 가상 장면들은 '실황'으로 잡힌 장면들과 어떻게 다른가? 정치권의 모든 고민을 자신이 다 안고 가겠노라던 노씨나, 현정권의 태생적 한계로 지적되던 '야합'을 거론하며 '당당'하게 맞서던 전씨의 모습들을 보여주던 '실제' 장면들과 말이다. 검찰에 출두하기 위해 연희동 자택을 나서던 노씨의 표정, 새벽 고향에서 구속되던 전씨의 표정은 이제 컴퓨터 그래픽으로 작성되건 카메라로 잡히건 시청자의 눈길을 사로잡는 화면을 메우는 영상일 뿐이다. 해방 후 처음으로 '과거사 청산'을 한다는 역사적 가상이 강력하게 작용하고는 있지만 현실은 이처럼 전자적으로 매개된 경험의 실감으로 대체되고 있다. '전근대적' 관행의 청산이 아직도 문제가 되는 상황에서 현실은 이미 미래 사회를 다루는 공상과학 소설에서나 나옴직한 형태로 바뀌고 있는 것이다.

 

테크노문화가 이처럼 더이상 강건너 불이 아니라면 '과학, 기술, 문화'라는 이번 호의 주제가 그렇게 생경하지는 않을 것이다. 물론 가상과 현실의 구분 와해는 그것의 대한 이해나 그것의 해체 또는 그것으로부터의 탈주 등을 어렵게 만드는 효과를 갖는다. 이번 호의 특집은 이 어려움에 대한 몇 가지 접근 시도들로 구성되었다. 총론격으로 실린 글에서 심광현은 '이중구속'이라는 말로 그 어려움을 표현한다. 그의 「테크노문화의 이중구속--생태론과 인공지능학의 유토피아/디스토피아」는 기술결정론을 경계하면서도 과학기술의 새로운 발전이 사회 전체의 변화에 미치는 영향을 중시하고 있다. 문화정치의 새로운 지형을 개념화하려는 값진 시도다. 테크노문화는 유토피아도 디스토피아도 아니라 하나의 정세라는 입장은 다시 '정보적 재구조화와 새로운 주체(성) 구성'의 문제를 다룬 안정옥의 논문에서 현단계 진보적 정치에 대한 모색으로 나타난다. 지배세력이 강조해마지 않는 '정보화'가 제기하는 이론적 실천적 지형 변경에 관심이 있다면 네그리의 논의를 통과하면서 정보재구조화를 비판적으로 탐색하는 이 논문의 일독을 권한다. 김소영의 「테크노 페미니즘」은 과학기술의 발전이 여성 지배를 어떤 식으로 진행하고 있으며 그에 대한 여성해방 전략은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에 대한 검토다. 이 논의는 과학과 기술에 대한 논의에 성차(gender)의 문제를 기입하고자 하는 시도의 일환이기도 하다. 김진균.홍성태의 논문은 기술혁명이 제시하는 청사진이 지닌 엄청난 음모에 대한, 첨단전자기술이 빚어내는 '멋진 신세계'에 대한 도취가 지닌 위험성에 대한 경고이다. 극소전자기술, 정보통신기술, 그리고 우주개발이 군사화와 맺고 있는 관계를 살핀, 현대 과학기술과 군사화의 관계를 비판적으로 고찰한 논문인 것이다.

특집에 번역 논문 두 개를 싣는다. 해레웨이의 「사이보그를 위한 선언문」은 발표된지 10년이 넘었지만 테크노문화 속에서 필요한 실천 주체의 한 유형을 보여주는 중요한 논문이다. "여신이 되기보다는 사이보그가 되겠다"고 하는 해러웨이의 선언은 심광현의 글과 김소영의 글에서도 다시 고찰의 대상이 되는 문제의식을 안고 있는 만큼 상호관련 속에 읽어주기 바란다. 또 다른 번역 논문은 장-프랑수아 료타르의 「신체없이 사유는 지속할 수 있는가?」이다. 국내에는 포스트모더니스트로만 알려진 그가 이 논문에서 제기하는 문제는 태양계 파괴 이후 지상적 삶이 종결되었을 때 가능한 사유의 형태, 또는 흔한 상상을 초월하는 상황 설정에 따라 필요로 하게 될 지각 테크놀러지에 관한 문제이다. 료타르의 사유는 다시 심광현의 글에서 언급되는 '부정의 미학'의 가능성과 결부되어 있어 보인다.

우리는 '과학기술', '정보화', 또는 '테크노문화'의 문제 들을 다루면서 손쉬운 양자택일보다는 이중구속의 딜렘마를 고민하려는 시도를 해보고자 하였다. 과학기술의 문제상황을 벗어나려는 노력은 결코 쉬울 수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는 적어도 '테크노피아'라는 장미빛 환상에 대한 종속으로부터만은 '탈주'를 하고자 하였다. 'SF영화의 문명과 그 불안'을 주제로 삼은 이동연의 글에서도 이런 시도는 계속된다. 그는 사이버펑크의 문화환경을 전지구적 정보 독점을 욕망하는 전체주의적 코드화에 대항하는 기계적 사유와 기계적 실천의 장소로 보는 인식론적 전환을 주장한다. 이런 인식론적 전환 또는 탈주의 전략은 또한 「문화와 질병」이라는 주제를 다룬 고길섶의 글에서도 이어지고 있다. 들뢰즈와 가타리의 '기계' 개념을 작동하여 질병을 진단하고 치료하는 의학 기계, 의료 과정을 상품화하는 동시에 노동자들의 질병은 외면하는 자본기계, 질병을 권력행위의 대상으로 분류하는 지배기계 등 사회기계들의 문제를 따지고 있다.

백지숙의 「광주 비엔날레 관람기」는 160만명의 대인파가 '사기당해' 몰려든 우스개행사에 관한 참여적 해부학이다. 국내 언론이 거의 한 입으로 상찬한 이 행사의 실상을 좀더 분명히 밝힌 글로서 가상과 현실의 또다른 구분 해체를 문제 삼고 있는 읽을 맛 나는 글이다.

 

8호로써 『문화과학』은 한 시절을 마감한다. 우리가 기획에서는 의도하지 않았으면서도 결국 새로운 실천의 양식이라 할 '탈코드화' 또는 '탈주'가 이번 호 여러 글들을 관통하는 중요한 전략으로 제시된 것도 그 때문이었던 듯싶다. 지난 3년 반 동안 겨우 여덟 번밖에는 책을 발간하지 못했지만 시작했던 지점에서 계속 맴돌 수만은 없다고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탈주'를 중요한 과제로 삼게 되었고, 이진경의 「필로시네마--탈주의 철학」을 특별 기획으로 싣는 것은 그 때문이다. 이진경은 권력의 길들이기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한 곳에 머무르지 않는, 권력을 안정화하는 표상체계의 포획에서 벗어나는 탈주가 필요하다는 입장을 피력하고 있다. 이 전략이 지님직한 위험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다시 한번 도약을 하기 위해서는 유목민적인 탈주가 필요하다고 믿는다.

 

9호부터는 편집진이나 체제 등도 일신할 계획이다. 새로운 모습으로, 그리고 좀더 안정적으로 독자 여러분과 만날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