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호를 발간하며
지금 우리사회는 "세계화"라는 신종 국가이데올로기로 덮여 있다. 각종 사회적 문제와 모순은 그 밑에 깔려 제대로 숨도 쉬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다. 이 "세계화"라는 언사가 우리 사회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 줄 것 같은 만능 키처럼 역설되고 있을 때, 사회 한켠에는 보수정치의 준동과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국제적' 차원에서의 착취, 그리고 소박한 상식을 비웃는 각종 대형사고가 줄줄이 이어졌다. 옛부터 집이건 나라건 안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할 때 일어나는 불만은 밖으로 눈길을 돌리게 해라는, 책략 아닌 책략이 있었던 것을 모르는 바는 아니다. "세계화"라는 신종 이데올로기가 여전히 이런 낡은 방법의 연장선 위에 있다는 사실은 그것의 허구를 논하기 앞서 오히려 처연함을 일게 한다. 하지만 현정권의 편의에 따른 구호와 상관없이 세계화라는 문제는 이제 우리 일상을 가로지르는 초미의 관심사가 아닐 수 없다. 멀미 조차 느끼게 하는, 정보통신 그리고 문화산업의 발전 속도 및 그것의 국가통합력이 사회 구성의 중대한 변수 및 요인이 되고 있고, 동시에 그런 환경이 우리를 이른바 '세계시민'으로 만들어 가고 있는 형국은 세계화 과정의 예증이 될 수 있기에 그렇다. 특히 이런 측면은 문화환경의 가속적 변화를 통해 주어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렇기에 예의 조건에 대한 깊은 통찰은 진보와 새로운 정치를 위해서는 지나칠 수 없는 사안이 되고 있거니와, 반대로 이를 간과하고서는 지금 진보진영의 곤란은 계속 지속될 수밖에 없다는 판단이 나온다. 우리가 이번 호의 특집을 '문화환경과 대중정치'로 정한 것도 이런 문제의식의 반영에서이다. 문화는 이제 더 이상 통념상의 자기 지위를 포기한 지 이미 오래다. 아니 포기라기보다는 다른 영역과의 적극적인 '따로 또같이'라는, 즉 유연한 이산과 결연의 방식을 통해 우리의 삶을 규정해 오고 있는 것이다. 문화실천, 정치실천의 장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닌 것은 그 때문이다. 말하자면 문화를 통한 정치효과나 정치를 통한 문화효과가 아니라 그 구분을 무연케 하는 자본주의적 문화정치가 수행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 자본주의적 문화정치에는 공(公)자로 시작하는 공간, 공공영역, 공공성 문제 등이 다 등재되어 있는 형편이다. 사정이 이럴 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진보적 의미'의 문화정치가 아닐 수 없다. 그렇다고 상대방의 방식을 빌려 와서 그것으로 상대를 넘어서겠다는, 소위 '차도살인지계'를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의 위험과 한계는 근대정치 속에서 이미 비극적으로 경험된 바 있다. 그러기에 우리에게 당면하는 것은 자본주의적 문화정치를 가동시키는 요소로서의 공간, 공공성 등의 임계점 너머로 나아가는 일이 아닐 수 없다. 특집은 바로 이런 것의 실천 가능성과 소정의 문제제기의 타당성을 살펴보는 시도라 하겠다. 이제 어느 정도 공유된 사실은, 진보의 기획과 실천에 있어 기존의 '전통적'인 정치형태만으로는 어렵다는 점일 것이다. 이는 당연히 새로운 정치의 조건이나 형태를 사고해야 한다는 필요를 제기한다. 이럴 때 일상과 공간과 문화적 공공역역 사이의 제반관계를 새로운 정치의 장이자 조건들로 간주하고 그것의 정치적 가능성과 현실성을 타진해 보는 강내희의 글은 주목에 값할 만하다. 번역으로 실린 캐더린 헤일즈의 글은 강내희의 논지에 연결되어 있는 글로서 가속적인 테크놀러지의 발전에 따라 마찬가지로 급속하게 변화하고 있는 문화과정, 노동과정, 나아가 주체형성 과정에 대한 꼼곰하고도 예리한 분석을 담고 있다. 그에 의하면 테크놀러지 발전에 따른 사이스페이스의 확산은 주제의 재구성 방식과 긴히 연관되어 있는데, 그가 강조하는 것은 이런 조건에서 정치 형태는 어떤 식으로 이루어져야 하는가 하는 문제이다. 사이버스페이스가 이제 유력한 문화현실이 되고 있다는 지적에 연해있는 이정재의 지하공간에 대한 분석은 현대 도시인의 지하공간 경험이 주체의 인식틀과 시각의 중요한 형성요인이 되고 있다는 점을 알려주고 있는데, 헤일즈의 글과 좋은 짝을 이루고 있다고 하겠다. 앞의 글들은 결국 공공영역이나 공공성 문제와 떨어져 있을 수 없는 것인데, 공공성 문제라면 여전히 하버마스의 입론이 주요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 담론과 공공성 문제를 하버마스와 그에 대한 푸코의 비판을 통해 살펴 보고 있는 황태연의 「하버마스의 공론장 이론과 푸코비판」은 하버마스의 공공영역 이론을 생각하는 데에 나름의 도움을 주고 있다. 한편 공공성이라는 것은 각종 사회적 실천에 다 걸쳐져 있는 문제가 아닐 수 없겠는데, 김창민의 글은 한라문화제라는 일종의 문화이벤트에 공공성 문제가 어떻게 지배시스템의 한 요소로 포섭되고 있는가를 구체적인 현장분석을 통해 보여 주고 있다. 기획란에서 주목을 요하는 글은 신병현의 [대형사고와 실천 논리]이다. 그는 요사이 우리사회의 저간을 뒤흔들고 있는 각종 대형사고를, 그리고 그것에 대한 각종 '담론'을 자본주의 체제의 통상적인 그러나 고유한 사회조직론과 담론 형태를 연결시켜 분석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대형사고에 대한 대중의 호기심 어린 담론들 속과 사고에 대한 다양한 의례적 반응 및 담론적 차이들 속에는 권력관계를 재생산하는 전형적인 정치수단들이 은폐되어 있는 바, 이에 대한 적출 및 대안 제출을 진보적 의미의 문화정치를 통해 수행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박설호의 글 역시 빌헤름 라이히라는 막중한 이론가의 문제의식을 살펴보는 글이기에 긴장적 독서를 요하고 있다. 특히나 성정치의 의미와 사회적 기능이 중시되고 있는 현대 상황을 놓고 볼 때 라이히의 문제의식을 더욱 발전시키는 것은 우리 사회의 중대한 현안이 아닐 수 없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맑스주의의 위기, 그로 인한 진보정치의 곤란이 회자된 것도 꽤 여러해다. 그렇다고 그에 대한 용한 처방이 나온 것도 아니다. 다만 지금은 진득하게 곤란함의 탈출을 위한 새로운 이론과 실천의 계기를 발굴하고 벼려야할 때라는 진단이 우세하다. 그런 점에서 이진경 글의 일독을 권한다. 그는 로자 룩셈부르크의 사상에서 맑스주의의 현재적 곤란과 근대정치의 한계를 넘어설 수 있는 요소를 환기시킨다. 이를 위해 그는 로자의 사상에 대한 기존의 범속한 해석을 거부하는 동시에 로자의 자발주의 테제의 합리적 핵심을 새로운 접근법으로 발굴해 내고자 한다. 로자의 사상에는 새로운 정치철학과 새로운 주체 형태 정립, 그리고 그를 통한 대중정치의 혁명성을 현실화시킬 수 있는 사상적 뿌리가 애초에 박혀 있었기에 그것을 지금의 조건에서 당대화시켜야 한다는 그의 주장은 경청해 볼만한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이번 문화현실 분석란에는 재미있는 소재를 다룬 글들이 실렸다. 이동연과 이득재의 글이 그것이다. 우선 이동연의 글은 최근 우리 사회에서 특히나 청소년들로부터 열광적인 반향을 얻고 있는 농구를 다루고 있다. 그는 이글에서 새로운 세대의 육체의 변화 그에서 비롯하는 감성과 욕망 형태의 변화, 광경, 문화산업 등의 명제로 최근의 '농구 신드롬'이 상품형식, 문화형식, 이데올로기 형식 사이의 연관성에 어떻게 걸쳐 있는가를 읽어내고 있다. 글의 소재나 문제의식 공히 읽는 재미를 더해 주는 글이라 할 수 있다. 이득재의 「패키지 신혼여행」 역시 재미있는 소재를 다룬 글이다. 여기서 그는 자연이 소비의 대상으로 등록되면서 어떻게 인공화되고 있는가와 그를 통해 인간이 스스로를 어떻게 소외시키고 있는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작금 문화현실의 주류는 역시 대중문화이다. 그러기에 대중문화에 대한 논의도 분분하다. 그러나 우리 사회의 대중문화의 역사가 짧아서인지 그에 대한 논의 역시 두텁지 못하다. 이런 차에 나온 박성봉의 대중문화 해석법은 대중문화 논의의 풍성함을 위해 좋은 일조가 아닐 수 없다.
『문화과학』의 돛을 올린지 이제 4년째에 접어든다. 긴 시간은 아니지만 그간 많은 독자들의 격려에 힙입어 『문화과학』이 내건 문제의식이 점차 확산되어 간다는 느낌은 우리만의 자족이 아니리라 생각한다. 물론 격려에 못지 않은 매운 비판도 받아왔다. 격려는 격려대로, 비판은 비판대로 『문화과학』의 편집방향에 담아 보려고 애는 썼지만 얼마만큼 잘되었는지, 그 판단은 독자들의 몫이다. 이 모두 새로운 책임과 쇄신의 계기로 삼으려 한다. 이런 다짐을 하는 가운데, 때마침 『문화과학』의 행로에 힘을 실어주는 분들의 동참이 있어 여간 미덥지 않다. 이 반가운 소식을 독자 제현에게 전한다. 홍익대에서 조직론을 강의하는 신병현씨, 종합예술학교 영상원에서 영화이론을 가르칠 김소영씨, 그리고 그간 『문화과학』의 뒷켠에서 빛나지 않는 그러나 중요한 일들을 묵묵히 해 오던 임상훈, 이동연씨 등이 편집위원일을 맡아 주시게 된 것이다. 새로운 인물들이 보충된 만큼 거기에 상응하는 『문화과학』의 매진을 약속드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