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호를 발간하며

 

세계사는 일단 자본주의의 새로운 단계 및 그것의 전지구화로 물꼬를 튼 듯하다. 강대국들 사이의 그리고 중심과 주변부 국가들 사이의 이해갈등이 앞으로 허다한 모순과 문제점을 드러내겠지만, 우루과이 라운드는 어쨌든 그 물꼬를 트는 데 제 역할을 제대로 해낸 것은 분명한 듯하다. 세계체제의 근본적 축이 전환하고 있는 형세 속에서 우리 사회는 김영삼정권이 내세우는 제2의 개국론과는 다른 의미에서 이전과는 질적으로 다른, 여러모의 변화에 직면해 있다. 언필칭 제2의 개항이라는 표현도 그런 변화 정세에 대한 이름붙이기일 터이다.

1백여년 전 열강들의 독점자본과 제국주의의 강요 앞에 조선 왕조는 자신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개항을 '윤허'해야 했고, 까닭이야 여하했든지 간에 그 개항은 한편으로 조선왕조의 몰락을 다른 한편으로 수동적 근대화라는 역사의 굵은 마디로 이어졌다. 그때가 서울 정도 5백여년 되던 어름. 전기, 철도, 전차, 영화 등등 신문명의 기물들이 속속 서울 장안에 들어와 서울 풍경을 바꾸어 놓기 시작했고, 당연히 서울 사람들의 살림살이가 바뀌기 시작했다.

1백여년이 흐른 올해, 그 1백년 변화의 모양새는 어쩌면 조선 왕조 5백년 동안 한양의 그것보다 더 크고 넓은 것이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아다시피 그 백년동안의 변화는 자본주의의 하층토가 본격적으로 형성되고 개발독재가 '드라이브'하여 계급적대의 예각화라는 칼날을 안은 채 독점자본과 소비사회라는 지점에 골인한 과정이었다. 그 과정에서 서울은 산업화라는 변화*성장의 거대한 상징이 되었고 남한 사회의 깊은 모순과 가능성이 집약적으로 모여있는 '현대적', '독점적' 도시로 화한 것이다.

공교롭게도 정도 6백년 되는 올해, 우리 사회는 제2의 개항을 받아들여야 하는 처지가 되었고 '국제화', '세계화'의 기치 아래 서울은 다시금 수동적 변화가 예상되는 시점에 와있다. 그러나 백여년 전의 개항과는 달리 이번에는 강대국들의 논리를 마냥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 우리 사회 성원의 다짐이 되고 있다. 이는 단순한 주관적 각오가 아니라 세계적 변화라는 객관적 조건을 무시하지는 않지만, 향후 무차별적으로 밀고 들어올 초국적 자본과 그에 연동된 국내 독점자본을 견제하고 대항할 수 있는 세력이 그간 계급투쟁의 도정에서 어느정도 축적되었다는 판단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의 결연한 다짐과 노력이 있는 한 앞으로의 개방국면이 초국적자본과 독점자본의 개활지로만 되지는 않으리라 본다.

 

우리가 이번호 특집을 <서울>로 삼은 것도 이런 문제의식의 반영이다. 그러나 단지 서울에 도읍을 정한 지 6백년이 되었으니 그에 상응하는 상투적 기념을 해보자는 것이 아니다. 물론 이 특집은 정도 6백년을 하나의 계기로 삼고 있기는 하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이것을 우리식 문제설정의 범역으로 끌어와야 한다는, 요컨대 서울이라는 공간의 생산, 구성, 배치, 연출의 역사와 현황을 정확히 천착하여 그것에 깃들어 있는 지배논리를 밝혀내고 나아가 그것을 전복할 수 있는 공간의 정치학을 모색해야 한다는 의도에서 출발했다는 점을 헤아려 주면 좋겠다. 이런 모색과 실천이 따를 때 6백년여년 동안 서울에 점착되어 있던 지배논리의 덧켜가 하나하나 벗겨져 새로운 차원에서 서울 공간의 재구성이 가능해질 것이다.

특집 1 <서울의 생김새>는 말 그대로 서울의 생김새에 대한 묘사이며 설명이다. 두말할 필요 없지만 서울시민들에게 서울은 일상의 공간 그 자체다. 그러나 일상이라는 낱말 속에는 그 일상을 지배*제어하고 있는 논리를 '일상적'으로 그냥 지나치게 만드는 독소를 품고 있다. 강내희는 서울이 일상의 차원에서 계속 새롭게 조직되는 공간이라는 점에 착안하여 그 공간의 거듭되는 변화를 공간을 둘러싼 계급적대의 동학이 드러나는 것으로 간주하여 그것을 일상 공간의 정치경제학이라는 문제설정으로 면밀히 관찰하고 있다.

이제 서울의 중심은 강남이 되다시피 했지만 아직까지 전통적 사고 속의 중심은 세종로이다. 정기용은 광화문에서 남대문까지 이어지는 길과 거기에 세운 건축물들의 특질이 역사와 연계되었을 때 형성되는 역사성의 문제에 주목하여 그 맥락을 잘 짚어주고 있다. 아울러 그는 이 길 구조물 거의가 제국주의적 침략논리의 공간적 안배에서 이루어진 것임을 준열히 지적하고 있는 바, 경청해야 할 대목이 아닌가 싶다. 황동일은 생산의 중심이면서, 그래서 대단히 중요한 지역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에게는 일종의 이방지역으로 여겨지는 구로공단 지역을 대상으로 하여 서울의 공간조직 논리와 그 변화양상을 추적하고 있다. 공간에 대한 근자의 분석이나 담론이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곳에만 집중되고 있는 형편에 비추어 볼 때 값진 글이 아니라 할 수 없다.

한편 영화와 서울 양쪽의 역사를 같이 걷게 하면서 그 궤적이 스크린 속에는 어떻게 '페이드 인'되었는가를 기술하고 있는 김소영의 글은 서울이라는 스펙터클에 비친 한국 사회의 산업화를 추체험할 수 있게 해 준다. 그 영화 속에 담긴 서울특별시민의 정체성과 삶의 표정을 '관람'하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백지숙은 우리가 자연을 비롯한 모든 공간을 바라볼 때 습관적으로 저지르는 이기주의적 태도를 지적하면서 그것은 어떤 방식으로 치유될 수 있는가에 대한 실마리를 차분하고 관조적인 문체로 이야기하고 있다. 자연과 인간의 관계가 새로운 적대로 부각되고 있는 이즈막 그의 문제의식은, 그 까닭에 돋보인다.

특집 2 <추억 속의 서울>은 촉촉한 글들이다. 필자 각각이 자신의 개인사, 그 중에서도 청춘의 한 지점에 강하게 박음질되어 있는 5,6,70년대 서울에 대한 회고는 그때를 살아보지 못한 많은 독자들에게 지금 서울의 모양이, 얼마나 곤궁하고 척박한 서울 살림살이의 흔적을 밟고 이루어졌나를 알 수 있게 할 것이다. 아울러 백기완, 박태순, 김정환 각 씨의 글들은 그들 특유의 강한 개성적 체험과 문체로 받쳐져 있는 것들이기에 서울에 대한 새로운 글읽기의 경험을 제공하리라 믿는다.

특집 3 <서울연구를 위하여>는 「공간환경연구회」의 도움으로 마련한 기획으로서 자본주의와 도시공간을 포함하는 전체 공간 사이의 상관성을 유물론적 도시이론의 성과를 통해 따져보면서 서울을 연구*분석하고 있다.

최병두는 도시공간의 정치경제학이라는 문제의식으로 도시공간은 어떤 사회에서든 그 사회의 생산양식이나 구성원리에 의해 규정되며 또한 동시에 그 생산양식의 재생산을 위해 주요한 역할을 하고, 따라서 어떤 특정 사회에 관한 분석에서도 빼 놓을 수 없는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고 역설한다. 동시에 그는 그런 조건에서 지배적 도시공간 구성 방식에 대항하는 도시정치와 시민사회운동을 촉구하고 있다. 조명래의 글은 1987년 이후 커다란 변화를 겪고 있는 서울의 정치경제를 자본의 '유연적 축적'이라는 관점에서 분석하고 있다. 그가 분석해내는 서울의 '도시성'은 근본적으로 자본의 운동에 따른 생활공간의 계층별 분화, 생활세계의 식민지화, 삶의 총체적 분열 등을 초래하는, '포스트모던'한 변화의 화려한 외관과 더불어 계속되는 계급논리로 특징지어진다.

'계급 적대'는 정준호의 글에서도 강조되고 있는 명제다. 포스트모더니즘 이론가인 제임슨과 최근 들어와서 중요한 도시 이론가로 부상한 데이빗 하비를 중심으로 도시이론의 쟁점을 검토하면서 도시공간을 정치적 실천의 영역으로 제시하고 있다. 이런 입장은 이정재의 글에도 지속되는 바, 그는 도시 경관 속에 사회적 관계, 특히 착취받는 노동을 은폐하는 측면과 공간을 합리적으로 재구성하여 지배하는 시각적 기술이라는 측면이 결부된 부르주아적 세계관이 깃들어 있다고 지적한다.

<논문>으로는 고길섶의 「담론의 정치학--언어와 이데올로기 그리고 주체의 실천」을 싣는다. 『문화과학』 2호에 전면적으로 다루어진 바 있는 유물론적 담론연구의 문제의식과 같은 연장선에 놓여있는 이 글은 담론연구의 지반을 풍요롭게 하는 데 일익을 담당하리라 자못 기대된다. 한편 「문화이론연구회」가 내 놓은 「'신세대론'을 비판한다」는 정확치 못한 분석 규준과 왜곡된 선입견에 기초했던 그간의 신세대 문제 분석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연구이기에 신세대 문제를 둘러 싼 논의에 새로운 계기를 제공하리라 본다.

 

우루과이 라운드로 대변되는 세계질서의 재편 속에서 초국적 자본의 문화산업이 물밀 듯이 치고들어 올 것은 뻔히 예상된다. 그런만큼 우리의 문화현실과 정세는 더욱 복잡해지고, 따라서 민중적*민족적 문화운동의 앞날에는 갈수록 많은 어려움이 돌출할 것 역시 마찬가지로 예상되는 바이다. 시절의 의미가 더욱 엄중해지는 이때 『문화과학』은 같은 뜻을 가진 분들과 연대하여 그 어려움을 돌파해 나가기 위한 배전의 노력 아끼지 않을 것을 약속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