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호를 발간하며

 

갑갑했던 대선 결과를 놓고 어수선했던 겨울도 지나고, 수십년 만의 '문민정부'의 시작과 함께 93년의 새 봄이 '활짝' 열렸다. 봄바람을 타고 출범한  '문민정부'의 '위로부터의 개혁'은 어떤 드라마보다도 더 큰 대중적 인기를 끌었고, 센세이션을 유발했다. 하지만 극소수의 인사가 경을 쳤을 뿐인 '재산공개' 과정은 소기의 정치적 효과를 거둔 채, 벌써 퇴색한 유행어가 되어 유령처럼 항간을 떠돌고 있다. '위로부터의 개혁'이 대선 패배 이후 민중민주세력이 휘청거리고 있는 현상황에서 얼마나 명실상부한 성과를 거둘지는 매우 의심스럽다. 정말 문제가 되는 것은 '위로부터의 개혁'과 '아래로부터의 개혁' 사이의 관계이고, 우려할 일은 후자의 압력 없는 전자의 독주이다.

그러나 현상으로 보면 위로부터의 개혁은 푸른 깃발을 드날리고 있는 반면, 아래로부터의 움직임은 '전망부재'라는 '악몽'에 시달리고 있다. 말을 꺼내는 것 자체가 진부하게 느껴질 정도지만 최근 2-3년간 현실사회주의권의 붕괴로 인한 충격 속에 '전망 상실', '전망 부재', '반성'을 논하는 소리가 너무 높았다. 그러나 곰곰히 생각해 보면 진짜 전망을 논할 수 있는 것은 이제부터가 아닌가 싶다. 매시대가 그 나름의 동력과 논리를 지니고 있다면, 오랫동안 강제력을 지닌 압력상자가 깨어지고 갇혀있던 다양한 힘들이 무수히 분출되고 있는 현실 속에서 복잡하게 흩어지는 힘들을 낡은(또는 새로운) '상자' 속에 되담으려 애쓰기보다는 시간과 공간이 흩어지고 뒤틀리는 지형 속에서 계급동학의 새로운 궤적을 분석하고 그 안에서 변화하고 있는 역학의 위상변화를 파악하는 일이 필요하다.

그 뒤틀리는 지형 속에서 특별히 눈에 띠는 것이 '욕망'이란 단어다. 한 때 생소하게 들리던 '욕망의 해방구'도 관용구가 되어 인구에 회자되고 있다. 사회적인 위화감을 조성한다고 오렌지족과 압구정동의 호화상점들이 철퇴를 맞기도 하는 모양이나 욕망의 문제는 '문민정부의 개혁'에 의해서든 민민운동의 도덕주의에 의해서든 더 이상 금제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입장에서 보자면 진짜 문제는 욕망의 금지(억압)냐 해방이냐가 아니라, 욕망 문제를 끌어안는 변혁인가 배제하는 변혁인가를 따지는 일일 성 싶다. 이런 맥락에서 '욕망'을 이번 호의 특집 주제로 삼았다.

'욕망'은 현재로서는 절실하지만 아직은 생소한 주제라, 특집의 서두에 이에 대한 접근을 쉽게하기 위해 강내희의 글 「욕망이란 문제설정?」과 윤소영이 번역한 발리바르의 「프로이트맑스주의의 교훈」을 실었다. 강내희의 글은 '욕망'이라는 주제가 1968년 혁명을 전후로 서구의 이론 지형에서 부상한 과정을 이론사적으로 정리, 소개한 글이며, 발리바르의 글은 맑스주의의 이론과 실천에서 욕망과 무의식이라는 주제를 온 몸으로 끌어안았던 빌헬름 라이히에 대한 회고적 논평을 통해, 오늘날 좌파이론의 문제설정의 지형을 검토한 글이다. 진보적 이론에서 욕망의 문제를 발본적으로 다루고자 할 때 맑스의 입장을 검토하는 일은 무엇보다도 중요한데, 아그네스 헬러의 연구에 힘입은 요점 정리식의 형태를 취한 서규환의 시론적 노트는 무엇이 쟁점인가를 살펴보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도정일과 이경덕의 글들은 욕망의 문제를 이론적 사유의 중심과제로 삼았던 프로이트, 라캉과 제임슨의 논의를 나름대로의 시각을 가지고 논평한 의미있는 글들이다. 박명진의 「영화산업의 욕망관리체제」는 욕망 문제의 현실적, 제도적 일측면을 살펴보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이번 호는 문화현실 분석이 취약하다. 본래 여러 꼭지를 기획했으나 필자들 사정으로 겨우 네 꼭지의 글을 간신히 취합하는 데 그치고 말았다. 이 난은 『문화과학』의 '야심적'인 기획이라 할 수 있는데, 우리의 문제제기와 국내의 글쓰기 관행 사이에 존재하는 큰 편차를 실감할 수 있었다. 더 장기적이고 치밀한 준비를 다짐함과 동시에 한편으로는 우리의 '문화현실'에 대한 필자 여러분들의 깊은 관심과 연구, 새로운 방식의 글쓰기 시도를 촉구한다. 이동연의 「문화산업의 새로운 이해를 위하여」는 현단계 문화운동의 새로운 변신과 새로운 문화정책적 전망을 위해서는 자본주의적 욕망생산과 소비 기제의 중심고리로 작용하고 있는 문화산업에 대한 새로운 관점과 더 정치한 연구가 중요하고 시급함을 강조한 글이다.

사실 '욕망'이라는 문제를 주제로 삼아 다룬다는 것은 이 문제영역이 기존 인문사회과학의 어떤 특정분야의 전공을 뛰어넘기 때문에, 접근 자체가 막막하게 느껴진다. 어쩌면 이제까지 우리가 일상에서 늘 부딪치면서도 이를 주제화하지 못했던 것도 따지고 보면 그런 막막함에서 연유하는 것일 터이다. 그런데 그런 막막함을 피하기 위해서 대개는 전공의 명확성이나 전문성에 매달리곤 한다. 우리가 '욕망'을 주제로 특집으로 삼고자 하는 것은 바로 배타적 전문성에 둘러싸인 우리 인문사회과학과 예술장르들의 낡은 '분점권'에 개입하고자 함을 뜻한다. 실제로 우리 사회의 전문가들과, 그들의 특권, 전문주의 이데올로기를 생산하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이 안전하게 제도화된 자본주의적 '분점권'을 둘러싼 공모의식과 다를 바 없다. 우리는 이제 이와 같은 분점권의 이데올로기적 장치와 지형, 제도들을 해체하고 변형시키지 않고서는 변혁의 문제를 제대로 거론하기 힘든 상황에 처해 있다고 느낀다.

우리가 현실사회주의권의 붕괴의 충격 속에서 그동안 경직되었던 운동논리를 '반성'하자는 논의를 할 때도 정작 빠뜨리기 쉬운 것이 바로 전문성 논리에 대한 반성이다. 물론 전문성의 논리에 개입한다고 해서 분과학문이나 예술의 고유한 미덕까지 일괄해서 폐기해야 한다는 얘기는 아니다. 문제는 역사과정을 통해 생산되는 전문화과정 자체의 형식과 논리틀이 지닌 이데올로기적, 정치적 성격을 재검토하자는 것이다. 우리가 이제까지 특집으로 다룬 '언어', '욕망'이라든가, 앞으로 다루고자 하는 '육체', '서울', '시간', '공간'과 같은 주제들을 다각도에서 검토하는 일은 일상의 구체적인 삶과 변혁의 정치적 과정이 절합되는 새로운 문제를 제기한다는 점 외에도 한편으로는 지식생산의 분점권이 지닌 이데올로기적 성격에 대한 문제제기를 내포하는 이중적 효과가 있다. 이는 다시 말해서 일상문화나 대중문화, 지식인 문화든간에 문화가 생산, 소비, 소통되는 과정 자체의 형식과 틀의 문제가 지배적인 사회적 제관계의 생산과 재생산에 미치는 효과가 결코 자명치 않다는 사실에 대해 주목하자는 것이다. 『문화과학』의 글들이 어렵게 느껴지는 것은 필자들 자신이 아직 이런 형식과 틀에 대한 이해와 통찰이 충분치 못하기도 하고, 우리의 독서와 사유의 관행이 삶과 문화과정을 틀지우는 다양한 비가시적 형식들 자체의 정치성 문제에 익숙치 못한 탓도 있지 않을까 싶다. 하지만 우리가 90년대의 문화적 실천과 이론의 새로운 절합,나아가 지식인 운동과 대중운동의 새로운 융합 가능성을 고민하면서 긴장을 늦추지 말하야 할 지점이 바로 이런 지점이다.

 

반가운 소식 하나 전한다. 『문화과학』 편집진이 이춘길과 이진경의 참여로 새롭게 보강되었다. 지난 8년간 독일 브레멘 대학에서 진보적 문화이론을 연구하여 「해방과 투쟁으로서의 문화」라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고 귀국한 이춘길과 소장 사회학자이자 실천적 활동가로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이진경이 기존 편집진의 지식과 경험의 한계를 보강하고 시야를 확대하는 데 크게 기여하리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