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호를 발간하며
반쪽 청문회를 마쳤다. 전 정권의 경제위기 자초를 반면교사로 삼겠다던 경제청문회는 별다른 소득을 거두지 못했다. 오히려 전임 경제 책임자들에게 해명의 기회를 제공하고 말았다는 여론도 만만찮다. 전파낭비만 했다고 핀잔받은 청문회이긴 했지만 그래도 소득이 전혀 없지는 않았다. 경제 청문회를 통해서 청문회 참가자, 증인, 텔레비전 시청자 모두가 이러저러한 의혹에 대한 추궁에도 불구하고 주요 요인이 두드러지게 드러나지 않아 답답했다는 데는 공감을 했다. 우리가 왜 이런 지경에 이르게 되었는지, 왜 이런 고통을 받아야 하는지를 해명해내는 일이 보통 어렵지 않음을 깨달은 것이다. 청문회 전만 하더라도 몇몇을 다그치면 실정자들로부터 실토를 받게 될 터이고 그를 통해 우리의 경제를 잘 추스릴 지혜를 얻으리라 내심 기대는 했었다. 그런데 청문회가 깊어갈수록 그같은 기대는 무너져 내렸고 안개가 걷히기는커녕 안개가 더욱 뽀얗게 피어오름을 목도할 수 있었다. 현정세는 어쩌면 청문회와 같이 파고들면 들수록 궁금증만 더해가는 양파같은 존재인지도 모른다. 경제가 바닥세를 쳤고 호전된다고 떠들어대지만 실업문제는 오히려 더 심각해지고 있다. 게다가 경제위기는 뜻모를 지역감정의 망령으로 이어지고 있으며 예전이 더 나았다고 전, 전전, 전전전 대통령들이 거들고 나서는 코미디같은 일들도 자아내고 있다. 고통분담을 외치며 구조조정을 행하겠다고 요란했지만 기실 고통전담하는 노동자들만 맥없이 거리를 나서고 있다. 실직 노동자들을 달래려 각 지역에 실업기금을 뿌려대지만 근본적인 대책이 되지 못하고 선거철 선거꾼들처럼 기금을 따먹으려는 이들만 모여들 뿐이다. 고등교육을 받고 교문을 나서는 젊은이들은 졸업이 바로 실직이라는 희한한 등식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 모든 것을 같이 이겨나가야 할 망령처럼 국가가 홍보해대는 바람에 누구 하나 뚜렷이 나서서 국가의 위기 대처에 대해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있다. IMF 위기 경제라는 이데올로기 아래 우리 모두는 '시지프스 코리언'이 되어 그 많은 짐들을 들추어메고 언제 닿을지 모를 언덕을 끊임없이 기어오르고 있는 꼴이다. 불확실한 미래. 올바로 진단할 수 없을 정도로 엉켜있는 모순의 켜들. 『문화과학』은 IMF 통치경제 시작부터 이 화두에 매달려 왔다. 지금의 위기가 결코 경제위기만으로 한정될 수 없다는 전제하에 사회적 대안을 제시하고 모순의 켜들을 풀 수 있는 끄나풀을 잡을 가능성을 타진해왔다. 그동안 학문세계가 내놓은 지식담론들이 대안부재와 체계적이고 과학적인 실천개입을 등한히 해왔음을 지적하고, 담론적 실천을 개입적 실천으로 전환할 수 있는 가능성을 모색해왔다. 담론적 실천과 개입적 실천의 짝패 구분을 경계하면서도 개입적 실천에 방점을 찍은 것은 그 동안 『문화과학』의 이론적 개입이 일정 성과를 거두었다는 자평과 아울러 이론적 개입만으로 그쳐서는 안된다는 자성 탓이었다. 진보진영이 오랫동안 방치해왔던 테제들을 점검하는 것만으로는 만족하기엔 현재 정세는 빠르게 질적 변화를 거듭하고 있으며 현지식담론 생산에 내맡기기엔 그 대응의지가 덜 치열하다는 진단 탓이었다. 『문화과학』이 이론적 주축으로 삼아왔던 다양한 문화연구들을 변형시켜 정책적 개입, 공학적 개입을 꾀하려 했던 이유는 바로 이론적 개입에서 실천적 개입으로 진입했음을 알리는 일종의 공표였다. 이후 정책제시, 문화예술 창작일지 발굴, 문화산업 지형변화 등에 적극 관심을 보였던 것도 그러한 이유 때문이다. 포스트주의의 지식담론들이 수용과정이라는 테제에만 함몰되어 생산과정을 등한시하거나 자본집중의 문화생산산업에 대해 태만하는 관행을 비판하는 동시에 그들의 낙관적 정세전망과 혼돈적 대안제시를 경계할 것을 일깨우고 다른 한편으로는 구 진보진영의 비역사적 집착증을 들깨운다는 취지로 이와 같은 실험적 개입실천이 모색되어온 것이다.
이번 호의 <특집> 화두인 '문화사회'는 그동안 『문화과학』이 정리한 이같은 자성, 개입에의 의지를 구체적으로 담고 있는 대안적 구성체다. 서구 좌파가 새로운 대안으로 내놓는 '제3의 길'과는 다르게 시민사회, 신사회운동 등만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과 사회, 문화를 한데 아우르며 사회를 재사회화할 것을 요구하는 전혀 새로운 프로젝트다. '제3의 길'이 이념화되어 국민 동원을 꾀하고 있음을 목도하면서 과연 진보진영의 운동은 어디로 갔으며 혹 남아있다면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점검해보는 진단 프로그램이기도 하다. 또 다른 한편으로 진보진영은 보다 더 체계적이고 과학적인 운동과 비전을 지녀야 함을 강조하는 실천적 방점이기도 하다. 현재의 경제위기는 쉽게 극복될 성질의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장기 지속될 것임을 전제하면서 강내희는 장기 지속적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대안으로 '문화사회'로의 이행을 주장하고 있다. 노동사회에서의 인간해방이 아니라 그 바깥에서의 인간해방을 꿈꾸는 것이 오히려 더 장기적인 전망이며 시민사회, 진보진영의 자기증식을 위해서 유익한 전략임을 강조하고 있다. 심광현은 '노동사회'에서 '문화사회'로의 전환을 통해 진보진영은 그동안 녹슬은 것으로 방치해두었던 문화운동의 새로운 가능성을 열 수 있으며 이를 매개로 문화주권을 되찾을 수 있는 가능성을 타진하고 있다. '문화사회'로의 전환을 문화연구와 문화운동의 주요 실천개입과제로 삼을 것을 제안하면서 지난 호에 이어 구체적인 실천방식 등을 소개하고 있다. 이동연은 '문화사회'로의 전환에서 예술운동은 예술환경의 민주화와 예술생산 방식의 개발과 프로그램화라는 이중적 과제를 가짐을 역설하고 있다. 문화사회로의 전환을 위한 예술운동의 실천과제로 예술생산 방식과 표현의 실험성, 소수예술가 집단으로서의 새로운 예술운동의 생성, 국가의 예술정책 비판과 예술운동의 자기정책 개발, 문화적 권리로서 예술환경의 공공성과 민주성 증대를 제안하고 있다. 임정희와 강내희의 대담은 노동, 교육, 공간, 주거환경, 여성, 2세 양육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분야가 '문화사회'로의 이행을 통해 얻을 수 있는 득을 점검하고 있다. '문화사회'라는 이번 호의 특집을 좀더 실감나게 우리의 일상, 외국의 사례 등을 통해 풀어내고 있으며 '문화사회'로의 전환이 멀리 있는 이상향적 프로젝트가 아니라 반드시 이루어야 하고 진보운동의 새로운 목표가 되어야 함을 명시하고 있다. '내가 꿈꾸는 문화사회'를 세 편집위원이 에세이 형식으로 집필해주었다. 홍성태는 생태론적 관점에서 지금과는 다른 시간과 공간으로 구성된 문화사회를, 고길섶은 화폐기계 작동의 소비사회를 넘어서 욕망이 자기 조직적 자발성으로 움직이는 문화사회를, 이동연은 새로운 감수성의 생성을 위한 문화적 권리를 제도적으로 보장하는 문화사회를 제안하고 있다. <쟁점 기획>에서는 최근의 지식담론을 점검하는 글 두편이 실렸다. 최갑수는 기든스의 '제3의 길'에 대한 진단을 통해 유럽 자본주의의 소생과 활력을 위한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파악하고 현정권의 대안적인 이념으로 포장해내는 지식담론들의 위험성을 경고하고 있다. 고길섶의 탈식민주의 담론 분석에서는 탈식민주의 이론의 한국적 수용과 실천을 비판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대담> 코너가 전에 없이 풍성한 느낌이다. 기획 대담 형식으로 짜여진 광주비엔날레 최민 전임 전시 총감독과 한겨레 신문 이주현 기자의 대담에서는 해촉으로 불거진 관료적 문화행정, 미술계 내부의 난맥상 그를 극복하기 위한 운동의 필요성 등을 나누었다. 최근 과천세계마당극제와 광주비엔날레는 그동안 문화운동이 운동의 의제 설정으로 혼란을 겪고 있는 사이에 문화정책, 문화행정의 주도권이 문화관료들에 손에 넘어가 전에 없는 새로운 모순을 드러내는 전형적인 사건으로 기억될 터인데 결코 수수방관할 수 없는 중요한 의제임을 대담을 통해 잘 드러내고 있다. 이 기획 대담은 문화사회로의 전환이라는 특집 주제와 같은 맥으로 이해된다면 문화운동의 방향, 문화사회로의 전략 등을 모색하는 데 도움이 되리라 믿는다. 앞으로 지속적으로 연재될 철학 대담의 첫 번째 손님으로 초대된 양운덕은 제도권 철학교육의 한계를 넘어서는 비제도권 철학교육의 유용성을 강조하고, 일상을 꿰뚫으면서도 일상으로부터 피드백을 받는 철학연구를 얘기한다. <정책>과 <분석>란에는 두 편의 글이 실린다. 원용진은 문민정부의 문화정책을 문화정치의 관점에서 평가했고 이성욱은 미국이 우리에게 어떻게 수용되었는가를 분석하였다. 두 편의 글 또한 앞의 문화사회로의 전환이라는 주제와 고길섶의 탈식민주의 담론평가 글과 연계되어 있어 유익한 정보가 되리라 믿는다.
매번 책을 낼 때 마다 『문화과학』이 동인지의 형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지나치게 폐쇄적이라는 반향을 불러일으키지나 않을까 걱정을 한다. 투고를 유인하고자 매번 광고를 하지만 자발적인 투고는 그리 많지 않았다. 이번 호도 예외는 아니어서 편집위원들의 글을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다. 항상 아쉬움을 느끼는 부분이다. 건강한 토론문화 형성과 새로운 진보의 전망 모색에 관심있는 독자제위의 적극적인 참여를 다시 한번 제안한다. 1999년 2월 원용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