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호를 발간하며
50년만의 정권교체로 국민의 정부를 출범시킨 1998년, 잔인한 IMF 구제금융 체제 원년의 겨울 문턱에 들어선 우리사회는 그 어느 때보다도 더 혹독한 추위를 체감해야 할 듯싶다. 앞으로 대기업 구조조정이 가시화되면 이미 500만명에 육박하는 실질적 실업자의 수는 더 늘어날 것이란다. 경기가 저점을 통과하고 있다고 하지만 경제위기와 함께 온 삶의 위기가 사회 전반에 강타하는 강도는 오히려 더 심해지고 있다. 실업, 풍찬노숙, 걸식, 가정파괴, 기아棄兒, 유아, 절도 등 온갖 사회적 파괴현상들이 난무하는 가운데, 사람들은 절망과 분노에 빠져 있다. 오늘 우리가 직면한 삶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사회의 구조개혁이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민주적 대안으로 요구되었던 재벌해체와 정치개혁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세계자본시장의 권력에 발목이 단단히 붙잡힌 상황에서 'IMF 국난극복'이니 '제2의 건국'이니 하는 슬로건만 나부낄 뿐이다. 이들 슬로건은 민중생존권 수호와 확대보다는 보수우익의 복권, 정권의 재생산, 반민중적 경제정책 등만 정당화시킬 따름이다. IMF 바람을 타고 링에 오른 신자유주의 지배정책은 "파국공멸론"을 내우며, 지배의 안정화와 보수화에 유리한 구조조정을 서두르고 있다. 진보운동 진영은 그동안 무엇을 했을까? 금융노련 비롯해 공공부문 노조를 포함하는 노동세력이 올해 내내 내걸었던 핵심 슬로건은 "정리해고 철폐, 고용안정 쟁취"였다. 그러나 그러한 고정된 슬로건은 오히려 정리해고와 고용조정이라는 언어게임의 대당적 파트너로 기능할 수도 있다는 것을 내부적으로 얼마나 깊이 인식하고 있을까? 판에 박힌 문제의식에 얽매여 있는 것은 아닌가? 고용안정에 대한 요구가 실제로 노동자들의 대량실업을 얼마나 막을 수 있었는지, 실업 이후의 노동자들의 삶에 대한 집단적 요구와 대안 마련에 얼마나 주목했는지 따져야 할 때다. 우리가 진보적인 실천이라고 자명하게 생각했던 방식들에 보수적인 습속이 배어있지는 않았는지, 그동안 쏟아져 나온 "진보적" 발언과 요구가 과연 얼마나 진보적이었는지 반성할 필요도 있다. 진보진영의 대응이 최근 『월간조선』이 또다시 벌이고 있는 "매카시즘적" 공세를 빼닮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논리와 과정 자체를 무시하고, 진보적 사유에 대해 지독한 "히스테리적 신경증" 빠져있는 한국 보수진영의 습속에 저항하려면 진보이론의 자기정책 자체도 생각보다 많은 세기와 지혜를 요한다.
우리가 16호의 특집으로 "21세기와 진보의 새로운 전망"을 정한 것은 IMF체제를 비롯해 일련의 한국사회 모순 구조에 대응하는 진보진영의 대응방식들에 획기적인 전환 없이는 21세기에도 진보한 사회를 구축하는 것이 어렵다는 문제의식 때문이다. 이진경의 「진보개념의 경계??근대적 진보를 넘어서」는 이성적 계몽주의와 목적론적 생산력주의에 갇혀있는 근대적 진보개념의 문제점들을 조목조목 따지면서, 그것과는 다른 탈근대적 진보개념을 모색하고 있다. 그는 근대적인 진보개념들은 '직선적이고 누적적인 시간개념', '기원과 목적의 변증법', '인간중심주의', '통합하고 동질화하는 전체주의'를 전제로 하고 있음을 비판하면서, 탈주선상에 있는 진보는 이질적인 것들을 담아내고 수용할 줄 아는 능력의 확장을 통해 얻어질 수 있음을 강조한다. 이에 비해 강내희의 글 「노동거부의 사상??진보를 위한 하나의 전망」은 IMF사태에 즈음해서 현재 진보이론이 안고 있는 실제적인 문제를 반영한 것으로서 노동정치의 문제틀이 '노동권'만이 아니라 '노동거부권'까지 포함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노동윤리학을 전면적으로 거부할 수 없었던 그간의 진보적인 노동이론이 노동해방의 논리를 "노동내의 해방"으로 이해했던 것과는 달리 이 글은 노동으로부터의 해방, 즉 탈노동적 실천을 제시한다. 그러나 강내희가 주장하는 노동거부는 인간활동 자체의 중지, 혹은 최대한의 억제라기보다는 오히려 비노동의 유효시간을 최대한 많이 확보하여 그것을 문화활동의 시간으로 전환시키자는 의미를 갖고 있다. 노동시간 단축운동을 통해 사회적 필요노동의 최소화와 개인의 자발적 문화활동의 극대화를 이끌어내자는 제안은 "정리해고 철폐, 고용안정쟁취"라는 노동계의 현재 슬로건에서 한발 더 나아간 노동정책의 한 과정으로 읽을 수 있겠다. 홍성태의 「생태위기와 생태론적 전환」은 시민사회 운동의 한 형태로서 생태운동이 활성화되어야 한다는 소박한 부문운동의 입장이 아닌 사회운동 자체가 생태운동화되어야 한다는 적극적인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그는 생태위기를 극복하는 대안으로 자연과 인간 모두를 포괄하는 생태환경에 대한 인식틀 자체의 전환을 기초로 해서, 사회이론과 사회운동 안에 생태적 전환이 수렴되는 것을 제안하고 있다.
<기획>란에 실린 '동서철학산책연재'에 지난 호에 이어 유초하, 이정우 선생이 나란히 자리를 채워주었다. 유초하의 글은 아리스토텔레스가 그의 스승인 플라톤 철학에 외견상 대립하고 있는 것같지만, 실제로는 스승의 이론을 창조적 계승하고 있다는 점을 사례로 들어, 철학하는 사람들의 과학적 인식과, 창조적 진리의 문제들을 우회적으로 풀어내고 있다. 이에 비해 이정우의 글은 내경의 의학의 존재론으로서의 '기'氣의 문제를 다룬다. 동양학에서 말하는 기란 근대적 의미에서의 물질이나, 그리스적 의미에서의 '힐레'와는 다르게 물체성과 에너지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흐름을 지닌 존재론적인 위상을 부여받는 것으로 양의학이 '장소의 존재'를 택하는 것과는 다르게 한의학은 '흐름의 존재'를 선택한다고 말한다. <논문>란에 실린 번역글 「탈노동 선언」은 강내희의 글과 함께 읽으면 도움이 될만한 글이다. 이 글에서 아로노비츠 등은 점차로 탈노동화되는 세계에 진보진영이 어떻게 적극적으로 개입할 것인지에 대한 구체적인 정책을 제시하고 있다. 이번 호의 <정세>란에는 최근 IMF 사태로 인해 급증한 '홈리스족'에 대한 분석을 담았다. 고길섶의 글은 홈리스족이 신자유주의 정책의 사회적, 인구적 배치과정에서 양산된 것으로 보면서 이들을 빈곤을 상징하는 상비군으로 보지말고, 자유의 영토를 횡단하는 도시의 유목민으로 새롭게 기호체제화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한다. 황인성씨의 글은 홈리스족에 대한 방송의 관심사가 홈리스 주체를 어떤 식으로 정형화하고, 담론화하는지 구체적인 프로그램을 분석하면서 보여주고 있다. <작가와의 대담>에서는 '푸른영상' 대표인 김동원씨를 만났다. 오랫동안 다큐멘타리 영화를 찍으면서 체험했던 한국의 문화현실에 대한 현장감있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 것이다. 『문화과학』은 문화예술현장에서 다양하게 활동하고 있는 작가들과의 지속적인 대담기획을 잡아놓고 있다. 앞으로 이 지면을 통해 많은 문화예술 생산가들을 만날 수 있게 될 것이다. <문화현실 분석>에는 세 꼭지가 실렸다. 최아룡의 글은 90년대 이란영화 부흥운동의 기수인 압바스 키에로스타미 감독의 <올리브나무 사이로>를 선택해서, 이란 사회에서 소수자들이라 할 수 있는, 거리의 일상 주체들에게 '길'은 갈등의 공간이면서 동시에 생성적 공간임을 상세히 분석하고 있다. 이밖에 권경우는 최근 독자들의 관심을 끌고 있는 일간지 만화 세 편을 비교분석하고 있고, 문선영의 글은 SF영화를 언급할 때 등장하는 과학, 자본, 가족, 종교, 합리성들에 대한 이중적 가치판단이 영화 <컨텍트>에서 얼마나 많이 충돌하고 있는지를 말해주고 있다.
올초 『문화과학』은 계간지로 전환한다고 공표한 바 있다. 일단 약속부터 먼저 해놓고 그 말빚의 무게를 느끼며 우리를 채찍질하자는 의미도 강했는데, 과연 약속을 지킬 수 있을까 하고 은근히 걱정했던 것이 사실이다. 계간체제로 전환하기 전에 나왔던 책들도 그리 순탄하게 나온 적이 별로 없었던 터였다. 다행히 지금까지는 매호가 예정된 시기에 맞추어 나와 독자들과의 약속을 지킬 수 있게 되어 마음이 놓인다. 『문화과학』이 나이값을 하기 시작하는 게 아닌가 싶다. 또 한 가지 반가운 것은 미학을 전공한 임정희씨가 새로운 편집위원으로 들어와서 앞으로 지역문화운동과 페미니즘에 대한 더 활발한 논의를 기대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다. 『문화과학』이 내년에도 안정적이고 다양한 활동을 펼치도록 독자 여러분의 관심과 질타, 그리고 격려를 바란다.
1998년 11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