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호를 발간하며
오늘 '경제'는 우리사회에서 가장 뜨거운 관심사요, 쟁점이다. 작년 연말 외환위기를 맞은 이후 경제위기가 노골화하면서 나라 살림이 온통 엉망이 된 탓이리라. 사실 한국은 지금 6.25전쟁 이후 어쩌면 가장 심각한 사회적 위기를 맞고 있고, 사람들이 겪는 고난과 궁핍도 그때를 연상할 만큼 참혹하다. 이 상황을 그러나 '경제'의 측면에서만 볼 수는 없을 것 같다. 오늘의 위기가 외환위기, 금융위기, 경제위기로 드러난 것은 물론 사실이다. 공식집계로는 150만명, 실제로는 400만명이 넘는 실업자가 생긴 것도 중소기업, 대기업 할 것 없이 대량으로 부도가 발생한 탓임을 부정하진 못한다. 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하여 화급하게 외채를 갚느라 정신이 없던 정부가 경제회복을 부르짖는 것도 그래서 무리는 아닐 것이다. 그러나 개혁을 내세워 IMF가 내리는 처방만으로 신자유주의 정책을 실시하는 것이, 국공영 기업의 민영화, 대기업 빅딜, 대량 정리해고의 유발 등 신자유주의적인 구조조정을 진행하는 것이, 즉 오로지 경제회복만을 목표로 삼는 것이 과연 옳은 사회정책인지는 또다른 문제다. 경제 파탄으로 일어나는 일들은 사회적, 정치적, 문화적 의미를 동시에 띠는 삶 전체의 문제다. 가정파괴, 기아(棄兒), 결식, 자살, 절도, 노숙, 걸식의 고통에 시달리는 사람들의 수가 급속도로 늘고 있는 것을 보면 오늘 우리 삶의 기반 전체가 파괴되고 있음을 실감하지 않을 수 없다. 경제회복으로 이런 현상들이 사라질 것으로 기대할 수 있을까? 개선이야 되겠지만 근본적인 치유가 될 것 같지는 않다. (초국적) 독점자본의 신자유주의 공세를 받은 나라치고 빈익빈부익부 경향이 나타나지 않은 나라는 거의 없다. 경제회복이 이루어졌다는 나라에서도 인구의 20%와 80%가 각기 빈자와 부자 집단으로 양분되는 것이 전세계적 현실이다. 오늘 우리가 겪고 있는 위기는 그래서 기업의 손익계산서나 산업경쟁력 등 좁은 의미의 경제로 환원되지 않는 사회적 생태계 전반의 문제, 총체적 삶의 위기로 봐야 할 듯 싶다. 삶의 위기는 삶을 영위하는 데 필요한 조건들이 파괴될 때 발생한다. 돈을 벌고 못버는 일은 이들 조건 중 하나일 뿐이다. 먹고 입고 자는 일이 어려워질 때, 사회 보장이 안되어 교육이나 의료혜택을 제대로 받지 못할 때, 대형사고나 자연재해에 무방비한 상태로 노출될 때도 우리는 위기에 부딪친다. 이는 경제발전만으로는 삶의 질을 높이는 충분한 조건을 확보할 수 없다는 말일 것이다. 경제발전을 이루어도 문화발전은 이루지 못한다면, 인간의 사회적이고 문화적인 활동에 필요한 충분한 자원을 확보하지 못한다면 경제발전의 의미는 감소할 수밖에 없다. 오늘 우리의 위기가 경제적 위기만이 아니라 삶의 위기라는 것은 이번 여름에 겪은 물난리로써도 충분히 확인된다. 대량부도, 긴축경제, 대량 실업 사태 속에 그렇잖아도 어렵사리 살아가는 상황에서 금세기 최대라고 할 홍수 피해를 당한 것은 엎친 데 덮인 격이다. 그런데 이번 물난리와 같은 자연재해를 기상'이변'이라는 이유로 한두 해에 국한될 예외적 현상으로 본다면 오산이 아닐까? 기상이변이 그동안 오로지 개발 일변도로 지내온 결과로 발생한 자연생태계 파괴의 후유증이라면 그것은 한두 번으로 그칠 현상이 아니다. 엘니뇨와 라니냐가 그 발생을 멈추지 않는 한 자연재해는 계속 반복할 수밖에 없다. 우리가 정부나 기업체가 주장하는 경제회복만으로 이런 문제들을 해결할 수 없다고 보는 것은 이런 이유들 때문이다. 삶의 조건을 개선하지 못하면, 부익부빈익빈 현상의 강화로 사회적 약자를 양산하는 오늘의 자본주의체제를 극복하지 못하고 자연파괴를 중단하지 못하면 삶의 위기는 지속될 것이다. 삶의 범형을 바꾸어야 할 시점이다. 모두들 중시하는 경제의 모습도 이제 바꾸지 않으면 안된다.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문화과학』은 "문화와 경제"를 15호 <특집>의 주제로 잡았다. 경제위기가 초미의 사회적 화두가 된 상황에서 위기의 진정한 뜻을 되새기려는 뜻도 있지만, 위기를 돌파하자면 지금까지 우리가 거의 무의식 수준으로까지 고수해온 경제주의적 관점에서 벗어나야 할 것이라는 우리 나름의 판단이 작용한 주제라고 할 것이다. 특집에 좌담을 준비하여 배치하였다. 좌담 참석자들은 대체로 김동춘이 언급한 "문화적 마인드"의 중요성에 공감하고 있는데, 오늘 우리사회의 문제를 단순히 경제주의적 관점에서 풀려고 해서는 발본적인 대안을 제시할 수 없을 것이라는 우리의 입장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좁은 의미로건 넓은 의미로건 "경제"와 "문화"는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좌담 중에 조항제가 정리하듯이 특히 문화산업을 중심으로 문화내 경제논리와 경제내 문화논리라는 형태로 양자는 상호 침투하면서 규정하고 있는 것이다. 다른 차원에서 경제를 넓게 이해하여 살아가는 문제로 생각할 경우나 문화를 삶의 방식으로 보는 인류학적 관점을 취할 경우에도, 문화와 경제는 거의 구분하기 힘든 동의어적 의미를 지닌다. 이때 경제는 이미 정치요, 사회요, 문화이며, 문화 또한 정치요, 경제요, 사회다. 이렇게 본 경제와 문화는 공히 삶의 조건을 바꾸는 일과 결부되어 있으며, 구체적인 차원의 변화를 요청하지 않을 수 없다. 예컨대 원용진이 언급하는 공공영역의 구축이나, 임정희가 말하는 지역 혹은 현장 차원에서의 문화운동이 중요한 것은 그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좌담 이외에 특집을 구성하는 글로 심광현의 「사회적 경제와 문화적 경제」로의 이행에 관하여」, 강수돌의 「경제와 사회, 그리고 생활문화」, 래보이 등의 「문화발전과 개방경제」를 싣는다. 이들 글, 특히 심광현의 글과 강수돌의 글은 경제위기를 보는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고 있는데, 문화적 관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심광현은 경제위기의 국면에서 등장하는 "문화의 부차화" 경향을 경계하면서 오늘의 위기 극복은 제3부문의 활성화 여부와 연결되어 있다는 논지에서, 이 부문 활성화의 전제가 되는 사회운동과 문화활동의 재구성이 필요하다는 주장을 펼친다. "문화가 경제에 봉사하는 것이 아니라 경제가 문화에 봉사해야 하는 '문화사회'로의 전환"이 지금 일어나고 있다고 보는 그의 글은 국가와 노동의 역할을 중시하는 구좌파적 모델과 분명히 선을 긋는 대안적 모델을 추구하는 것으로서 새로운 사회구성체 논쟁을 촉발시킬 소지가 다분히 있어 보인다. 다른 한편 오늘의 경제위기에 대한 비경제주의적 접근을 시도하고 있는 강수돌은 "경제란 돈을 버는 것이 아니라 먹고 사는 것을 뜻"한다는 예의 관점을 제출한다. 그는 경제위기는 외환위기나 기업의 수익성 위기가 아니라 사회적 삶의 위기라고 보면서 경제주의적 관점을 벗어나지 않는 한, 그리하여 그동안 당연하게 여겼던 생활방식 전반을 근본적으로 성찰하지 않는 한, 삶의 위기는 반복하게 될 것임을 경고한다. 우리가 맞이한 "총체적 삶의 위기"에 대한 대안으로 그는 "뒤집어 보기", "다르게 느끼기", "이어 보기", "빠져 나오기", "새롭게 만들기" 등을 제시하고 있다. 또 다른 한편 래보이 등은 문화발전을 이루고자 하는 공공정책의 문제를 다루는 과정에서 문화, 교육, 미디어 분야 등에 특히 관심을 기울이면서, 전통적인 문화적 실천들, 대중매체에 기반한 소통, 공교육 등에서 국가의 역할이 여전히 중요하다는 입장을 펼치고 있다. 이 입장은 전세계적으로 강화되고 있는 개방경제로 상업적 요구가 증대함에 따라 나타나는 사회적 공공성의 약화를 방지하려면 국가의 시장 개입이 강화되어야 한다는 주장이라는 점에서 "전통적인" 입장이라고 하겠지만, 민주주의와 공공성 강화를 위해 문화발전의 전략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우리의 관심을 끈다.
이번 호부터 『문화과학』은 본격적인 계간 체제로 돌입한다. 그 동안 열네 번씩이나 책을 펴냈지만 띄엄띄엄 내다보니 정세에 대응하는 글들을 시의적절하게 배치하기가 어려웠던 게 사실이다. 이제 정례적으로 책을 내게 된 만큼 그동안 우리가 강조해온 이론적 개입을 '정세에 맞게' 낼 수 있는 기본 조건을 갖춘 셈이다. 이번에 정세와 관련된 글의 하나는 <정책>란에 실은 고길섶의 「지구촌시대, 언어정책의 패러다임의 전환을 위하여」이다. 이 글은 최근 문제가 되고 있는 한글과컴퓨터의 아래아한글 개발 포기 사태와 복거일의 영어공용어론을 둘러싼 논쟁을 화두로 "언어적인 것과 비언어적인 것의 혼합된 정세"를 분석하고 있다. 고길섶은 언어정책은 언어시장에 대한 개입으로 봐야 하며, 마이크로소프트사가 아래아한글을 패퇴시키려는 것은 세계체제적 언어시장의 논리라고 지적한다. 그에 따르면 오늘날 언어적 상황의 개선은 언어시장, 언어정책, 언어제도의 변형을 통해 언어능력 혹은 언어적 생성의 조건들을 변화시킬 때 비로소 가능하다. <정세> 글로 1980년대 후반 이후 미국에서 극렬하게 진행되고 있는 "문화전쟁"에 관한 글을 싣는다. 한국사회도 이제 신자유주의적 경제정책으로 인해 사회의 보수화가 우려되고 있고, 특히 도덕적 보수주의가 팽배할 가능성이 있다. 미국의 신보수주의 세력이 벌이고 있는 문화전쟁은 남의 동네 이야기지만 그에 대한 이해를 갖추는 것도 타산지석 이상의 의미가 있다고 본다. 15호에서는 <서평>란을 신설하였다. 이 또한 계간으로 전환하면서 정세에 맞는 주제들을 발굴하기 위해 마련한 것인데, 앞으로 시중에 나온 책들 중 우리 관심을 끄는 것들을 골라 분기별로 주제서평의 형태로 실을 참이다. 이번 호에는 고길섶, 이광석, 문선영 등이 서평을 준비하였다. <기획>에서는 이전부터 진행해온 연재를 계속 싣는다. 유초하의 글과 이정우의 글이 그것이다. 이 글들에서 유초하는 지식 혹은 지혜에 대한 동서양의 차이에 관하여, 이정우는 『소문』이라는 의학 관련 글을 중심으로 동양과 서양의 신체론을 비교 설명하고 있다. 유초하는 동양의 철학, 특히 유가에서는 삶의 문제와 무관하거나 삶의 문제를 담아내지 않거나 못하는 이론이나 주장은 의미나 가치를 지니지 못한다는 점을 깨우쳐주고 있고, 이정우는 특히 도가에서 적극적인 신체관을 가진 결과 동양에서는 신체의 고양에 큰 의미를 부여하는 양생론이 발달할 수 있었다고 지적한다. 앞으로 계속 연재될 이 글들이 동북아적 사고의 특징을 우리가 좀더 잘 이해할 수 있게 기여할 것으로 믿는다. <분석> 글로 고병권의 글을 싣는다. 오시이 감독의 에니메이션 작품인 <공각기동대>에 대한 "철학적 감상" 형태를 띤 이 글에서 고병권은 전뇌화(電腦化)를 이룬 "인간"의 인간 넘어서기 모습을 추적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이 에니메이션은 "그것이 표현하는 문제를 철학적으로 사용하는 것"을 가능케 하는 "철학적 텍스트"다. 이 텍스트는 우리에게 '인간성'과 '정체성'을 버리라고 말하는데 자신의 정체성을 지킨다는 것은 곧 니체가 말한 허무주의적 태도일 뿐이기 때문이다. 아울러 <논문>으로는 로지 브라이도티의 「새로운 노마디즘을 위하여」를 싣는다. 브라이도티는 최근의 페미니즘이 질 들뢰즈의 사유를 적용하고 있는 양상들을 뤼스 이리가라이, 모니끄 위티그, 다나 해러웨이 등의 경우를 통해 추적하고 있다. 그녀는 "들뢰즈와 함께 분자적, 노마드적, 다중적인 욕망하는 주체라는 새로운 종류의 주체를 구성하지 않고서는 사회적 변화란 없다고 생각한다"며 들뢰즈의 사유방식이 페미니즘에 중요한 시사점을 던지고 있음을 인정하고 있다.
어려운 여건 속에서 『문화과학』은 이제 본격적인 계간지로 전환하게 되었다. 그동안 견지해온 '문화이론전문지'라는 성격은 물론 계속 지킬 것이다. 하지만 아무래도 계간지로서의 성격을 강화하자면 지금까지와는 다른 자세로 임해야 할 것으로 생각하며 배전의 노력을 기울일 것임을 약속 드린다. 진보적 잡지들이 여러 이유로 발간을 중단하거나 어려움을 겪고 있는 상황에서 『문화과학』이 새로운 발전의 길로 접어들 수 있게 된 것은 많은 분들의 도움 때문이다. 앞으로도 독자 여러분의 지속적인 성원을 바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