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호를 발간하며
올 것이 오고야 말았다. 화려한 소비의 불야성 뒤에 찾아온 한국경제호의 침몰, 이것은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공개를 미루다 끝내 실토를 강요당한 무능의 모습이다. 처방의 이름이 공교롭게 IMF(국제통화기금)라며 우리 각자는 F학점을 받은 꼴이라는 자조도 들린다. 이 지경이 되기까지 무엇을 했던가? 서로 대통령이 되려는 인사들이 '네 탓'이라고만 해서인지 누구의 잘못인가를 따지는 것은 쓸모없다는 주장이 제기된다. 경악과 한탄, 자성 속에 내핍과 분발을 외치는 구호가 그래서 크게 들린다. 앞 다투어 천민적 과소비를 부추기던 대중매체는 눈하나 깜짝이지 않고 허리끈을 졸여 매자고 야단들이다. 경제가 어려우니 우리 모두 참고 견디자고? 새벽종이 울렸다며 일하러 가자던 박정희의 노래를 다시 부르는 꼴이다. 개발독재의 산물인 재벌지배가 일으킨 경제파탄의 책임을 정리해고의 형태로 대중에게 전가하기 위함이 아닌가. 오늘의 경제위기는 우리사회 시스템이 큰 고장을 일으켰음을 보여준다. 시스템의 고장은 분석을 방해한다. 네탓이요, 내탓이요 하고 떠들지만 원인은 잡히지 않는다. 아니, 잡히지 않는 척한다. 불이 났다고만 떠들뿐 어디서, 어떻게 난 불인지 따지지 않기 때문이다. 재벌경제, 정경유착 등이 이유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사실 없다. 그렇다면 고장이 문제라기보다는, 고장으로 판명했어야 할 것들을 모르쇠로 치부한 것이 더 큰 문제가 아닌가. 당이름 변경만으로 호적이 바뀌었노라 호도하고, 엊그제 한솥밥을 먹던 자들이 이제는 서로 다른 세력임을 강변하거나, 결코 함께 해서는 안될 세력간의 동맹이 아무렇지 않게 이루어지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런 판에서는 사실을 사실로 인식하고 말하는 것도 어렵다. 고장의 경고가 붙고, 문제 집단의 격파와 세력 교체가 일어나야 할 곳에 억지 봉합만이 작용하는 것이다. 오늘의 위기는 진정한 변화가 없었던 데서 나온다. 변화가 생기지 않았던 것은 차이와 저항의 소음들을 억압과 탄압의 방음시설로 차단하고, 삐걱거리는 관절들을 억지로 꿰맞추어 새로운 흐름들을 막았기 때문이다. 삐걱거림, 소음이라는 사실을 사실로 받아들이지 않고 조화라고 호도했기 때문이다. 차이를 동일로 치장하고, 문제의 봉합을 능력으로 위장했기 때문이다. 욕망의 흐름들은 다를 수밖에 없다는 점을 끝내 인정하지 않고, 하나의 공리계로 묶어내려는 억지를 언제까지 지속할 것인가? 문제들을 공개해야 할 때다. '사회기계'의 삐걱거림의 징후들을 발견하고 그것들의 발작을 더 격화시키자. 합의와 총화가 아니라 차이들의 환원불가능성, 이견의 불가피함, 이익 상반의 필연성을 인정하자. 그래야만 탈주의 선이 열릴 것이다.
우리는 13호의 특집을 꾸리면서 시대의 결을 거슬러 차이와 소음을 극대화하고자 하였다. 「한국의 문화담론 문제있다--논쟁을 제기하며」라는 제목을 뽑아 도발적인 자세를 취한 것도 그 때문이다. 논쟁적인 글들을 모은 것은 국내 문화현실에 대한 점검과 개입을 강화하기 위함이다. 『문화과학』은 창간 초기부터 '이론적 실천'을 제창했고, 그동안 우리 문화논의에서 별로 중시하지 않던 문제적 주제들(육체, 언어, 욕망, 공간 등)의 발굴에 주력하였다. 물론 주제의 발굴만으로 그 실천이 제대로 이루어질 수는 없을 터이다. 지난 호에서 21세기 한국문화의 발전 방향을 기획하고, 이번 호에서 국내의 이론적 흐름들, 연구의 관행들, 문화논의들, 문화운동의 실천적 관행들에 적극적으로 '참견'하는 것은 이론적 효과를 좀더 실질화하기 위함이다. 이 노력은 심광현의 「맑스주의의 전화와 탈근대적인 급진적 문화정치의 전망」에서는 최근 국내 진보이론계에서 나온 맑스주의 재구성 시도에 대한 비판적 검토의 형태로 나타난다. 심광현은 계급관계와 비계급관계의 '관계'를 비환원적으로 보면서 동시에 계급중심적 관점을 견지할 것을 주장한 김세균의 입장에 대한 반론을 제기한다. 맑스주의의 전화를 위해 정말 필요한 것은 계급관계와 비계급관계들 중에서 어느 것이 중심적이고 주변적인가를 따지는 일보다는, 그 관계들이 본래부터 '내재적인 교차관계'를 이루고 있다는 점을 발본적으로 인식하는 일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심광현에 따르면 경제는 언제나 문화경제이며 문화는 언제나 문화정치이며 정치는 언제나 정치경제이다. 알튀세르의 '중층결정' 개념을 발전시켜 들뢰즈와 가타리의 이론과 결합시키면서 '탈근대적 급진적 문화정치'라는 새로운 진보이론의 모델을 제시하는 그의 글은 진보이론계에 작지 않은 파장을 일으킬 것으로 보인다. 강내희의 「문학의 힘, 문학의 가치」는 최근 문학범주를 둘러싸고 국내에서 일어나고 있는 논의들에 대한 점검이다. 국내 리얼리즘론자들을 염두에 둔 이 글은 리얼리즘론에 입각한 민족문학론이 '근대문학제도'를 영토화하고 있다는 관점을 제출한다. 문학범주의 비판과 옹호를 둘러싼 문제들을 살피는 과정에서 강내희가 제출하는 견해는 문학은 이데올로기적 성격과 창조적 성격을 동시에 갖지만, 문학이 이데올로기적 성격을 갖게 되는 것은 그 창조적 성격 때문이라는 것이다. 문학의 '가치'를 니체와 들뢰즈가 말하는 '힘'의 관점에서 사고함으로써 문학적 창조성을 역동성의 문제, 감각의 문제로 치환하고, 나아가 문학의 물질성을 '기념비'의 관점에서 보는 시도도 곁들인다. 고길섶의 「문화비평과 진보의 분열들」은 1990년대 문화비평에 대한 '전투적' 비평이다. 그는 문화비평들이 진보의 새로운 지평들을 여는 데 개입해왔다고 본다. 하지만 문화비평에도 여러 갈래가 있다고 보고, '비판'보다는 '생성'을 지향하는 비평을 높이 산다. 생식의, 욕망의, 신체의, 주체의, 이미지의, 감수성의, 영상의, 정체성의 분열들에 대한 담론적 개입이 그가 생각하는 문화비평에서의 생성이다. 그는 분열에는 여러 종류가 있다고 본다. 생성의 선을 타는 분열, 파시즘의 선을 타는 분열, 나르시시즘의 선을 타는 분열, 죽음의 선을 타는 분열들이 그것이다. 이들 중 그가 지향하는 것은 생성의 선을 타는 분열이다. 이 분열에서 벗어나는 문화비평은 그의 비판 대상이 된다. '실명제'로 거론되어 그의 비판을 받는 비평가들의 반응이 궁금하다. 이동연의 「의미화실천, 주체화양식, 실험공학의 장」은 근년에 관심을 모으고 있는 '문화연구'에 대한 성찰이다. 그의 글은 문화연구가 의미화실천, 주체구성, 실험적 생산공간이란 세가지 구성요소들을 문화운동의 장 안으로 실천적으로 절합할 수 있는 이론적 지도를 그리는 데 목적을 두고 있다. 특히 문화연구의 국면들이나 문화담론의 배치들 내부에 작동되는 메커니즘이나, 그것들이 서로 단절되면서도 절합되어 있는 다층적인 지형도를 어떻게 개념적으로 읽어낼 것인가, 한국문화연구의 담론적이고 비담론적인 실천의 현실개입력을 어떻게 확대할 것인가에 주목한다. 이동연이 제시하는 의견은, 문화연구가 의미를 해석하기보다는 생성하고, 의미행위를 사후적으로 추적하기보다는 그것의 탈영토적인 욕망을 먼저 배치시키는 데로 방향을 전환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성욱의 「문화운동 바뀌어야 한다」는 문화운동계에 제출하는 제언이다. 이 제언은 오늘날 문화예술생산양식은 크게 변화하였기 때문에 문화운동방식이 크게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성욱이 중요하다고 보는 것은 예술생산과정에 기술공학적 요소가 외삽됨에 따라 예술가와 예술의 범주 혹은 정체성에 생기는 변동이다. 이로 인해 한편으로는 기술공학에 관련된 지식, 다른 한편으로는 예술적 요소와 비예술적 요소들의 절합과정에 대한 지식인의 기획적 지식과 실천력이 필요해진다. 이성욱은 이 결과 문화예술생산의 양식과 실천은 '문화공학'적 성격을 띠게 된다고 본다. 당연히 문화운동의 방식이 바뀌어야 할텐데, 한국의 문화운동을 총합하고 있는 민족예술인총연합(민예총)이 새로운 형태의 조직으로 탈바꿈해야 한다는 지적이 제출되는 것은 이 맥락에서다. 많은 시민단체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전자주민카드제도를 도입하기 위한 주민등록법 개정안이 기어코 통과되고 말았다. 전자통제사회의 도래를 앞당길 이 제도가 통과된 데에는 통제사회에 대한 시민 일반의 무관심도 많이 작용했을 것이다. 홍석만의 「엔터키를 눌러라」와 류승준의 「고도를 기다리며」는 전자주민카드제도에 어떤 끔찍한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지 보여주기 위해 기획한 글들이다. 두 사람이 문학적 상상력을 통하여 미래사회 미리보기를 시도한 것은 우연이 아마 아닐 것이다. 대부분 사람들은 통제사회에서는 어떤 일들이 벌어질지에 대해 무관심하거나 그 끔찍함에 대해 실감을 갖고 있지 않다. 허구의 형태를 통해 전자주민카드제도가 통제에 악용될 경우 미래사회의 개인들이 어떤 꼴에 놓이게 될지 홍석만과 류승준은 잘 보여주고 있다. 두 사람 모두가 통제사회에서도 저항의 몸짓이 있을 수밖에 없다는 점을 믿고 있다는 점이 우리에게 일말의 희망을 안겨준다. 『문화과학』은 그동안 사회와 역사에 대한 본질주의적 접근을 경계해왔다. '민족주의'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지녔던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지만, 민족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룬 적은 아직 한 번도 없다. 고부응의 「식민 역사와 민족공동체의 형성」은 우리사회의 중요한 쟁점인 민족문제에 대한 관심 표명의 첫 신호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문화현실분석에는 두 개의 글을 실었다. 구동회는 최근들어 부쩍늘고 있는 도시탈출 현상을 '전원담론'을 통해 살피고 있다. 그가 보기에 중산층의 도시탈출은 탈근대사회의 대도시 소비공간에서 부유하는 인간주체가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자연과의 유대롤 재확인할 수 있는 공간을 탐색하려는 욕구의 발현이다. 류제홍은 「정치의 몽타주에서 몽타주의 정치로」에서 오늘날 몽타주가 지니고 있는 정치적 의미를 분석해 보이고 있다. 몽타주는 비동시성의 동시성이라는 구성을 지닌다. 이런 몽타주를 류제홍은 제임슨의 선형적인 관점과는 다른 방식으로, 즉 '잡종성'의 관점에서, '변증법적 이미지'라는 관점에서 읽을 것을 제안하고 있다. 이번 호의 정책 제안으로는 원용진의 「통합방송법 제 길 찾기」를 싣는다. 제안, 폐기, 입법유예 등의 과정을 거치면서 꼴이 우스워진 이 법안을 제대로 만들기 위해서는 그동안 팽팽하게 맞서온 '공익론'과 '시장론'의 한계를 모두 벗어나서 '사회적 자원'이라는 관점을 도입해야 한다는 것이 원용진이 제출하는 해법이다. 우리사회의 문화현실에 좀더 깊숙이 발을 들여놓기 위해 13호부터 문화생산자 혹은 활동가의 현장 실천을 중개하는 성격의 글들을 마련하기로 하였다. 편집인 심광현이 제1회 부천국제영화제의 프로그래머 김홍준을 만나 문화페스티벌의 당면 과제들에 관해 나눈 대담도 현장에서의 실천을 다룬다. 김홍준감독이 자신이 참여한 현장의 특징들, 문제점들, 가능성들에 대한 분석과 전망을 해준 것은 현장보고의 좋은 예로 보인다. 김감독은 부천영화제가 부천이 영상산업도시로 발전하려는 경제적 목적과는 무관하게 치러질 필요가 있다고 본다. '문화의 세기'라고 하면서 문화를 경제의 종속 변수로만 보는 경향이 드높아지는 시점에 문화행사는 시민에게 제공하는 문화적 서비스로 간주될 필요가 있다는 그의 말에는 현장에서 활동하는 사람이 지닌 말인 만큼 무게가 실려 있다. 현장보고를 싣고자 하는 것은 문화를 대상화하거나 텍스트로 취급하여 감상, 관찰, 비평하는 것으로 그칠 것이 아니라 문화과정에 생산적으로 참여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앞으로는 작가일지도 게재할 예정이다. 이론적 실천이 제대로 기능하려면 문화생산 현장에 실천적으로 참여하여, 이론이 어떤 개입적 효과를 가지는지, 이론의 문제설정이 현장에서는 어떻게 작용하는지 점검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론의 현장 참여 결과 생길 생산과정의 변화에도 주목해야 할 것이다. 『문화과학』은 앞으로 문화이론과 문화공학의 접속가능성을 계속 모색하고자 한다.
편집진이 보강되었다는 반가운 소식을 전한다. 효성가톨릭대에서 영문학을 강의하는 태혜숙과 미디어밸리에서 일하는 홍성태가 새로이 참여하게 되었다. 태혜숙은 『문화과학』에 부족한 여성적 시각을, 홍성태는 과학기술과 관련된 시각을 크게 열어줄 것으로 기대한다. 1997년 12월 16일 강내희 |